“기념판이라도 내자” 노래 실력만 보고 무심코 건넨 제안, ‘국민 가왕’ 조용필을 탄생시켰죠

박강민 기자

등록 2025-10-06 19:47

직접 가사까지 수정하며 공들인 ‘돌아와요 부산항에’ 공전의 히트 기록

친한 나훈아 LA서 영화제작비 부족 알고 거금 3억 원 지원한 통 큰 의리파

[레전드인터뷰] ‘조갑출과 25시’ 리더 드럼 연주자 조갑출 


사진 조갑출 대표 = 트롯뉴스 

가요계에는 수많은 히트곡과 스타가 있지만, 그들을 탄생시킨 결정적 순간 뒤에 숨은 인물들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만약 군 제대 후 미래가 불투명했던 한 청년을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가왕’ 조용필과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 운명적인 제안을 했던 사람. 신중현 사단의 핵심 멤버이자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전설의 드러머.

 

‘트롯뉴스’가 살아있는 전설 조갑출을 만나 그의 뜨거웠던 음악 인생과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미8군, 치즈버거, 그리고 꺾을 수 없었던 열정

 

모든 전설의 시작은 미미했다. 

그의 음악 인생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곳은 기회의 땅, 미8군 무대였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드림클럽을 가득 메운 미군들이 한국밴드가 연주하는 유명 팝송을 따라 부르며 환호할 때의 뿌듯함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조갑출은 당시의 에피소드를 추억하며 소년처럼 웃었다.

 

“미8군 무대에 출연하면 클럽에서 식사가 나왔어요. 그때 먹었던 수제 치즈버거 맛은 최고였습니다. 감자튀김을 케첩에 찍어 먹을 땐 멤버들 모두가 탄성을 질렀죠. 프라이드 치킨은 와우!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기타 줄이 귀해 전선을 깎아 쓸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그 어떤 것보다 뜨거웠다. 

 

 


‘기타의 신’ 신중현과의 만남, 한국 록의 새벽을 열다!


 신중현과 애드포


 “연습실에서 연습하는데 신중현 씨가 와서 구경하다 저를 스카우트했어요. 그렇게 ‘에드포(Add4)’ 활동이 시작됐죠.”

신중현과 만남은 그의 음악 인생에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에드포 해체 이후에도 ‘블루즈테트’, ‘액션스’ 등에서 신중현의 곁을 지키며 한국 록 사운드의 기초를 다졌다.

“신중현 씨 닉네임이 ‘잭키’였어요. 작은 키로 벤처스 스타일의 기타 솔로를 연주할 때면 미군들이 환장했습니다.” 그의 말을 통해 ‘기타의 신’의 젊은 시절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잭키와 그일행

 


신중현은 1960년 초 그룹 에드포를 결성 후 당시 미국의 인기밴드 벤처스(The Ventures)의 음악 스타일을 차용하여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연주곡을 했다. 벤처스는 경쾌하고 발랄한 리듬에 기타가 주도하는 연주곡으로 유명했을 때였다.

 

조갑출은 신중현과 결별 후 ‘조커스’ 멤버로 참여하여 라틴음악으로 대히트를 쳤다. 

멕시코 고유의 챙이 큰 모자를 쓰고 공연했던 ‘조커스’는 각 팀의 리더들이 팀원이 되어 구성된 그룹으로 당시 최고의 하모니를 자랑했다.

 

이후 조갑출은 “내 이름을 건 밴드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조커스에서 나와 ‘조갑출과 25시’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이때 ‘조갑출과 25시’에서 보컬로 활동했던 가수가 훗날 국민 가왕으로 불리게 된 조용필이다.


 조갑출과 25시


  

운명의 제안으로 잠자던 ‘가왕’을 깨우다!

 

조갑출의 이름 앞에는 늘 ‘조용필을 발굴한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의리가 있었다. 

시간은 1970년대 중반, 조갑출이 이끌던 밴드 ‘조갑출과 25시’가 부산 극동호텔 등에서 활약하며 주가를 올리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밴드의 보컬은 조용필이었다.

 

“용필이가 노래를 아주 잘했습니다…. 우리 밴드에서도 보컬로 꽤 오랫동안 함께 활동했죠. 그러다 군 영장이 나와서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됐습니다.”

세월이 흘러 군 복무를 마친 조용필은 마땅한 활동 무대 없이 쉬고 있었다. 그때, 조갑출은 군 제대를 한 조용필을 불러냈다.

 

“제가 용필이를 불러서 레코드 취입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솔직히 제안하면서도 저도 앨범이 성공한다는 확신은 없었어요. 하지만 그 재능을 그냥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도 저의 제안에 용필이가 고맙게도 흔쾌히 응해주었습니다.”



 

조갑출은 ‘조갑출과 25시’에서 조용필이 가끔 부르던 곡을 시대에 맞게 가사를 조금 손보기로 하고 이태현과 함께 약간의 가사수정을 거쳐 안치행에게 편곡을 부탁했다. 

“안치행에게 편곡을 부탁했더니 호텔 커피숍에 앉아서 쓱싹 하더니 금세 편곡을 끝내더라고요…. 그렇게 녹음한 곡 중 하나가 바로 ‘돌아와요 부산항에’ 였습니다.”

 

막상 음반을 만들려니 앨범에 수록할 신곡이 부족했다. 결국, 밤무대에서 함께 부르던 옛 노래 7곡을 골라 녹음하기로 했다. 실패의 두려움보다 함께 음악을 한다는 즐거움이 앞섰다. 

어쩌면 “실패하면 우리가 함께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기념판이 되는 거지”라는 소박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후에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후에 한국가요 최초로 앨범 100만장 판매 돌파 기록을 세웠다. “그 노래가 그렇게 엄청난 히트를 해서 조용필을 ‘가왕’으로 만들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조갑출의 동료에 대한 믿음이 담긴 판단, 그리고 “기념판이라도 만들자”라던 그 소박한 제안이 한국 가요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성공과 후회, 무대 아래에서 배운 인생의 리듬

 

하지만 그의 인생에도 아쉬움의 변주곡은 있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성공 직후 남부러울 것 없이 잘나가던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마침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히트하고 벼락부자가 된 킹레코드 박 사장이 미국에 같이 가자고 제안해서 당시 맡았던 ‘연주분과위원장’을 끝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잘못 끼운 첫 단추 같습니다.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거기서도 하고 싶은 건 다 해봤으니까요.”

“그때는 음악을 하면서 큰돈을 벌기 어려운 환경이었어요. 지금은 K-POP 가수들이 유명해 지면 큰돈을 벌지만, 당시엔 어려웠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음악을 계속하려면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사업을 시작했죠.” 조갑출은 하와이에서 패티김, 조용필 등 당대 최고 스타들의 디너쇼를 기획하고 나이트클럽도 운영하는 등 사업가로도 수완을 발휘했다. 

사업은 성공을 해서 꽤 많은 돈을 벌었다.

 

 

나훈아에게 영화제작비로 거금을 선뜻 내놓다!

 

조갑출은 나훈아와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으로 떠나 하와이에서 사업이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나훈아가 영화촬영을 위해 LA에 방문했다. 평소 친하게 지냈던 터라 먼저 미국에 가 있던 조갑출은 물심양면으로 나훈아의 LA 로케를 돕게 된다.

“LA에서 영화촬영을 하는데 많은 엑스트라가 필요한 것을 알고 주변 지인에 연락해서 수십 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해 주었어요.” 또 당시 자금이 부족했던 나훈아를 돕기 위해 하와이에서 급히 돈을 송금받아 영화제작을 도와주기도 했다. “자금이 달리는 것을 알고 그냥 있을 수 없어서 내가 하와이 사업으로 꽤 돈을 모았던 때여서 당시로선 큰돈인 3억 원을 급히 마련하여 지원해 주었다”고 밝혔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엄청난 거금을 선뜻 지원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조갑출의 통 큰 배짱과 의리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나훈아 출연 영화

 

 

‘조커스’ 시절 옛 시민회관 공연 기립박수 잊지 못해

 

오랜 세월 수많은 가수와 함께 무대를 했던 전설의 드러머 조갑출은 기억에 남는 공연으로 옛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의 그룹사운드 경연대회 무대를 꼽는다.

“제가 국내 유일의 라틴그룹인 ‘조커스’ 멤버로 활동할 때입니다. 

당시 시민회관에서 그룹사운드 대회를 했는데 ‘키보이스’, ‘히식스’, ‘ 데블스’, ‘트리퍼즈’, ‘라스트챤스’와 제가 활동하는 ‘조커스’ 등 40여 개 팀이 경연을 펼쳤습니다. 그때 우리 ‘조커스’가 CM 송 메들리를 했는데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치면서 열광적으로 환호하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정말 열기가 굉장했습니다. 잊지 못할 무대였어요.”


 조커스



조갑출은 과거 밴드 1세대 입장에서 요즘 트로트 열풍을 포함한 현재 대중음악계에 대해서도 애정 어린 관심을 보였다.

“트로트는 여러 음악 장르 중 한국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음악이죠. K-POP하고는 다르다고 봅니다. 한국의 K-POP 뿌리는 저 같은 보컬 그룹(그룹사운드)이 1세대입니다. 우리가 50년대 미국의 발라드, 재즈, 컨트리, 락 음악을 일찍이 받아들여 연주하고 후배 가수들에게 전수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의 대중음악이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을 만큼 많이 성장하고 후배들 또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모습 흐뭇하고 보기 좋습니다” 

 

 

나에게 드럼이란? “두드려라. 문이 열린다!”

 

대한민국 1세대 레전드 드러머에게 드럼이란 무슨 의미일까를 물었다.

“‘두드려라, 그러면 문이 열린다.’입니다. 비트가 없으면 노래에 맛이 없어요. 열심히 두드리며 노력하면 문이 열리게 됩니다. 다시 시작한다면 더 화려하고 멋진 연주로 꿈을 펼치고 싶습니다.” 조갑출은 아직도 무대를 보면 설레는 천상 드러머였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오랜 음악 동지인 작곡가 안치행과 팬, 동료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트롯뉴스에게도 대중음악의 역사를 올바르게 소개해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한 인간의 믿음, 성공 뒤의 아쉬움, 그리고 꺼지지 않는 열정. 

조갑출의 삶은 화려한 기교가 아닌, 진심이 담긴 드럼 연주처럼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Steve. Kim(시애틀문화저널 편집인), 조갑출 대표, 박강민 편집장(트롯뉴스), 안치행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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