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인터뷰] "임희숙의 꿈은 다 이뤄... 죽을 때까지 무대 위에서 잘난척 하다 가고 싶다"

박강민 기자

등록 2026-01-02 15:13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는 마치 내 삶을 훔쳐보고 만든 곡 같았다

굴곡진 나의 삶이 빚어낸 연대기 같은 명곡 만난 건 내 인생의 축복

내로라하는 대한민국 가수들이 불렀지만, 매번 원곡자 임희숙 소환

월세 살면서도 그의 통장은 늘 가족과 교회,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

□ 대체 불가 대한민국 '소울 대모' 임희숙


임희숙의 무대는 어디에서나 대체불가 열정 그 자체이다.(본인소장)

대한민국 가요계에는 수많은 레전드와 명곡이 존재한다. 세월이 흐르면 원곡은 박제된 채 잊히거나, 새로운 감각과 실력으로 무장한 후배들의 리메이크에 자리를 내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예외는 있다. 전주가 흐르는 순간 무대의 공기가 바뀌고, 가슴 밑바닥을 긁어내는 듯한 허스키한 첫 소절에 객석이 숨을 죽이는 노래. 

임희숙의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이다.

이 곡은 가창력 좀 있다 하는 가수들에겐 일종의 ‘성배’와 같다. 90년대 발라드 황제 변진섭부터 ‘맨발의 디바’ 이은미, R&B의 요정 박정현은 물론이고, 성인 가요의 대부 조항조, 호소력의 여왕 백지영, 거친 미성의 조장혁까지 이 노래를 거쳐 갔다. 경연 무대에서는 더 화려하다. 뮤지컬 배우 정영주의 압도적 성량, 알리와 거미의 짙은 소울, 손승연의 폭발적인 고음도 이 곡에 도전했다.

 

최근 트로트 오디션 열풍 속에서도 이 곡은 빠지지 않는다. 전유진의 처연한 재해석부터 양지은, 김호중, 박서진, 김희재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9살 트로트 신동 유지우까지 불렀다. 

하지만 수많은 리메이크가 쏟아질수록 대중은 역설적으로 원곡자 임희숙을 소환한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후배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삶의 무게가 켜켜이 쌓인 ‘진짜 소울’이 있기 때문이다. 그 대체불가 소울은 어디서 온 것일까.

 

국내 유일 트로트 전문매체 트롯뉴스(www.trotnews.co.kr)에서 불세출의 레전드 가수 임희숙씨를 만나 그의 음악과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포화 속에서 태어난 '재수 없는 아이'


임희숙의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소울(Soul) 그 자체였다. 1950년 6월 29일, 6.25 전쟁이 터지고 사흘 뒤 피란길에서 그녀는 태어났다. 태어남과 동시에 아버지는 납북되었고 세 살 위 언니는 전쟁 통에 굶어 죽었다. 친가에서는 그녀를 두고 “집안 망하게 한 재수 없는 애”라며 손가락질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화가였던 새아버지와 재가했다. 훗날 시인이 된 이명룡,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를 만든 이민용 감독이 그녀의 이복동생들이다. 하지만 어린 희숙에게 그 집은 늘 타인의 공간 같았다. 

어머니는 가수가 되겠다는 딸의 머리카락을 듬성듬성 고슴도치처럼 잘라버리고 정릉 근처에 있는 절로 유배를 보냈다. 어머니 자신도 가수가 되려다 겪은 상처를 딸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으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희숙의 내면에 깊은 고독과 독기를 심어주었다.


어린시절의 임희숙(개인소장)

15살 소녀는 머리가 잘린 채 절 방에 갇혀 지내며 운명적인 첫사랑을 만났고, 집안의 반대 속에서도 음악감상실 DJ 부스 뒤에 숨어 ‘샘 쿡(Sam Cooke)’의 노래를 들었다. 

흑인 노예들의 고통이 서린 그 애절한 리듬은 방공호에서 태어나 가족의 냉대 속에 자란 소녀의 마음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것이 대한민국 ‘소울 대모’의 태동이었다.

  

미 8군 무대와 대마초라는 사형선고


중학생 시절, 이미 5만 원이라는 거액의 CM 송 개런티를 받을 정도로 천재성을 인정받았던 그녀는 1968년 미 8군 무대에 입성한다. 

당시 미 8군은 실력 없는 가수는 발도 못 붙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6개월간 한 달에 25번씩 공연하며 흑인들의 슬랭과 창법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박인수와 함께 활동하며 두 사람은 각각 대한민국 소울의 ‘대부’와 ‘대모’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하지만 영광은 짧고 고통은 길었다.

1975년, 연예계를 뒤흔든 ‘대마초 파동’에 그녀의 이름이 올랐다. 임희숙은 “스페셜 미팔군 쇼를 갔다 오다 일행 중 누군가 대마초 혐의로 잡혀서 현장에 임희숙이 있었다고 말한 거다. 나는 대마초를 입에 대지 않았는데 억울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녀는 결백했다. 하지만 노래할 때 감정에 취해 눈을 지그시 감는 모습이 대마초에 취한 것처럼 보인다는 황당한 이유를 대며 수사관들은 “약을 안 하고는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없다.”라며 그녀를 몰아세웠다.

 

결국, 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방송 금지라는 가수로서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한창 꽃피워야 할 20대의 가수가 무대를 잃었다. 이혼과 누명, 그리고 어머니마저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그녀는 결국 음독자살을 기도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말했다. “하늘이 나를 살린 건, 아직 부를 노래가 남았기 때문이야.”


데뷔초기  임희숙(개인소장)

국악(唱)을 만나 깊어진 한(恨), 그리고 '참회록'

 

방송 활동이 막힌 6년은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다. 

그녀는 우울증을 이겨내기 위해 병원 앞 명창 김소희 선생님의 학원을 찾아갔다. 소울의 대모가 국악 ‘창’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6개월간의 혹독한 수련은 그녀의 목소리에 단단한 뼈대를 만들어주었다. 서양의 소울과 동양의 한이 만나는 지점, 임희숙만의 독보적인 바이브레이션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1984년, 마침내 운명 같은 곡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가 그녀에게 왔다. 작곡가 백창우는 그녀를 만나기도 전에 그녀의 목소리만 듣고 곡을 썼다.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라는 가사를 받아 든 순간, 임희숙은 눈물이 났다. 그것은 가사가 아니라 자신의 34년 인생 그 자체였다. 

임희숙은 “그 곡을 처음 받았을 때, 마치 나의 인생을 훔쳐본 것 같았다.”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당시의 마음을 회상했다. 그 곡은 굴곡진 임희숙의 삶이 빚어낸 연대기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마초 누명으로 잊혔던 가수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무대에 섰을 때, 대중은 경악했다. 과거보다 더 깊고, 더 처절하며, 더 따뜻해진 그녀의 목소리에 온 국민이 위로받았다. 이후 이 곡은 대한민국 가요사의 ‘대곡(大曲)’으로 자리 잡았고, 가창력을 증명하고자 하는 모든 가수의 워너비 곡이 되었다.


사진 =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 수록앨범  리메이크의 홍수 속에서도 변치 않는 원형

 

오늘날 수많은 후배가 이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 곡에는 테크닉 그 이상의 ‘인생’이 담겨야 하기 때문이다.

변진섭이 맑은 미성으로 이별의 슬픔을 노래했다면, 박정현은 R&B의 화려한 수식어로 곡을 장식했다. 전유진은 어린 나이가 믿기지 않는 깊은 감성으로 MZ 세대에게 이 곡의 가치를 알렸고, 김호중은 성악적인 풍부한 성량으로 곡의 웅장함을 더했다.

그러나 임희숙은 후배들의 리메이크를 보며 그들을 평가하지 않는다. 

“누가 부르든 자기만의 한을 토해내는 것일 뿐, 그 해석은 각자의 자유”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단호하게 덧붙인다. “하지만 ‘너를~’이라는 첫 소절의 느낌과 ‘아~는지~’로 끝나는 그 여운은 오직 내 삶을 통과한 목소리만이 낼 수 있는 영역”이라고.

 

사람들은 그녀의 무대를 보며 ‘대체불가’라고 말한다. 그것은 단순히 노래를 잘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겪은 전쟁, 가난, 유배, 누명, 죽음의 고비가 그 한 곡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임희숙에게 이 노래는 사랑 노래가 아니라 ‘사람’을 위한 노래이자 세상에 남기는 자신의 유언과도 같은 곡이다. 그는 “자신이 언제 세상을 떠나더라도 이 노래만큼은 세상에 남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했다.

 

 서양의 리듬에 동양의 뼈대를 세우다

 

많은 이들이 임희숙을 ‘소울의 대모’라 부르지만, 그녀의 음악을 단순히 흑인 가스펠이나 R&B의 번안으로 치부하는 것은 큰 실례다. 그녀의 소울은 1950년 전쟁통의 비명에서 시작되어, 1970년대 암흑기 동안 명창 김소희의 문하에서 배운 ‘창(唱)’을 통해 완성된 ‘K-소울’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터뷰 중 자신의 노래기법에 대해 말했다. 

“노래는 분석해서 부르는 것이지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에요.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 소절인 ‘너를~’입니다. 여기서 화자가 상대를 보내고 싶은지, 붙잡고 싶은지, 아니면 체념했는지가 결정되죠. 그리고 마지막 ‘아~는지~’에서 그 모든 감정의 여운을 닫아야 합니다.”

이것은 판소리의 ‘발림’이나 ‘추임새’와 닮아있다. 

쥐어짜지 않아도 온몸에서 배어 나오는 그 처연한 소리는 서양의 비브라토와 우리 소리의 ‘떠는 목소리’가 절묘하게 합쳐진 결과물이다. 수많은 가수가 이 노래를 리메이크하며 고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음정은 맞출 수 있어도, 그 첫 마디 ‘너~를’에 담긴 70년 인생의 무게를 실어 보내는 것은 오직 임희숙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소리는 기술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하며 단련된 영혼의 울림이다.


사진 = 개인 소장

 가족, 가장 아픈 역린이자 지켜야 할 의리

 

임희숙의 삶을 관통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가족’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스스로 외동딸이라 부르며 살았다. 배다른 동생들이 자신의 유명세 때문에 상처받거나 피해를 볼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를 만든 이민용 감독과 시인 이명룡은 모두 그녀의 소중한 동생들이다. 그녀는 새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동생들을 위해 50년 넘게 ‘여자 가장’의 삶을 기꺼이 짊어졌다.

 

“어머니는 내게 가장 아픈 존재였어요. 내가 노래하는 것을 그렇게 반대하셨던 것도, 나를 볼 때마다 6·25 때 잃어버린 남편과 죽은 딸이 떠올라 괴로우셨기 때문이죠. 나는 엄마의 가장 아픈 ‘역린’이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 섬겼던 임희숙은 “아무리 어려워도 나의 곤고(困苦)함을 남에게 보이지 않고 사는 것이 마지막 목표”라면서도 월세방에 살며 검소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수많은 히트곡을 냈지만, 그녀의 통장은 늘 가족과 어려운 이웃, 그리고 교회를 향해 열려 있었다. “나를 위해 쌓아둔 것은 없지만, 내 동생들과 어머니에 대한 의리를 지켰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라는 말에서 대스타 임희숙이 아닌, 인간 임희숙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그녀의 노래 속 ‘사람’은 멀리 있는 대중이 아니라, 그녀가 평생을 바쳐 사랑하고 지켜온 가족들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후배들의 권익을 지키는 일에도 열정

 

77세의 임희숙은 이제 자신을 위한 무대를 넘어, 후배 가수를 위한 무대를 고민한다. 그녀가 대한가수협회 지명 이사로 활동하며 가장 힘쓰는 분야는 역설적으로 ‘법’이다.

“대한민국 가수들은 노래를 아무리 불러도 해외처럼 ‘저작인접권’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요. 선배들이 잘못 닦아놓은 법을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나는 자식도 없고 남겨줄 것도 없어요. 하지만 후배들에게는 ‘노래한 만큼 대접받는 세상’을 남겨주고 싶습니다.”

20여 년 전, 정훈희 등 동료들과 500만 원씩 사비를 털어 지금의 가수협회 기틀을 만든 것도 그녀였다. 

누명을 쓰고 방송에서 쫓겨났던 그녀였기에, 권리 없이 무대에 서는 후배들의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안다. 무대 위에서는 소울의 대모로, 무대 아래에서는 후배들의 권익을 지키는 열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진 = (사)대한가수협회 감사패 전달식 / 임희숙 SNS

 인생이라는 무대의 ‘앙코르 송’

 

임희숙은 인터뷰 내내 자신의 삶이 ‘꿈을 이룬 삶’이라고 강조했다. 비록 굴곡지고 상처투성이인 인생이었지만, 그 상처가 있었기에 ‘샘 쿡’의 영혼에 닿을 수 있었고, 그 고독이 있었기에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라는 명곡을 완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무대에서 ‘잘난 척’ 하다가 가고 싶어요. 악단 선생님들의 반주에 맞춰 내 온몸의 소리를 관객들에게 쏟아낼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그녀는 아직도 매일 연습실로 출근한다. 

77세의 나이에도 월세 연습실을 유지하며 매월 월세를 내는 가수는 아마 대한민국에 그녀뿐일 것이다. 그녀는 지금도 2024년 발표한 신곡 ‘사랑의 순례자’를 연습하며, 내일의 무대를 꿈꾼다.

변진섭부터 유지우까지, 수백 명의 가수가 그녀의 노래를 리메이크하며 각자의 이별을 노래했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누군가 삶의 무게에 눌려 등이 휠 것 같을 때, 가장 먼저 찾게 될 목소리는 역시 임희숙이라는 것을. 그녀의 소울은 고통을 견뎌낸 자만이 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위로이기 때문이다.


애장품을 전시하고 있는 빈티지 숍

대한민국 가요사에 임희숙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여전히 우리 곁에서 “가거라 사람아~”라고 노래해 준다는 것.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축복과도 같은 일이다.

 

임희숙. 그녀의 노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올해 4월을 목표로 '예우회'와 함께 준비하고 있는 전국 순회공연 무대 위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인생의 무게를 덜어낼 준비를 한다.

“가거라 사람아, 세월을 따라~” 그녀의 노래가 흐르는 한, 우리 중 누구도 혼자 쓸쓸한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


  예고 입학시험에서도 장난삼아 답안지에 만화를 그리고 나올정도로 임희숙은 그림을 좋아했다. 실제로 수준급 실력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날 인터뷰중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주었다.  (사진아래) . 임희숙이 발표한 최근의 앨범들(사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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