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내 노래가 누군가의 위로가 되리라는 믿음으로 10년 무명 버텨”
양로원 봉사 공연 때 불편한 몸으로도 진심으로 호응하는 모습에 울컥
95세 노모를 향한 막내아들의 고백이자, 감사의 노래 ‘어머니’ 발표도

30년 경력의 베테랑 안경사, 무대에서 대중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가수. ‘안경사 가수’ 정경관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이름으로 살고 있지만, 그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은 진심 어린 ‘소통’이다.
안경사 정경관은 고객의 눈을 맞추며 세상의 빛을 선물하고 가수 정경관은 관객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삶의 위로를 노래한다. 그는 자신의 두 직업을 “안경사로 사는 삶은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자기표현이라면 가수로서의 활동은 감성적이고 창의적인 자기표현”이라고 정의한다. 눈을 맞추는 일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은 결국 하나의 길이었던 셈이다.
그에게 소통은 직업이 아니라 삶의 방식 그 자체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며 삶의 에너지를 순환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안경사로서 고객과의 신뢰를 쌓고 가수로서 관객과 감정을 나누는 능력은 결국 ‘소통’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소통의 즐거움이 두 직업을 30년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신안의 섬 소년 두 개의 꿈을 꾸다!

정경관의 특별한 이중생활은 그의 어린 시절로부터 시작된다. 고향 신안에서 동네 어른들의 민요나 타령을 곧잘 따라 부르던 꼬마는 초등학교 소풍 무대에서도 ‘끼’를 발휘하는 등 음악은 그의 삶에 자연스럽게 함께하면서 늘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정치를 하던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는 완강했다. “막내가 직업도 없이 돈벌이도 안 되는 일을 하려 한다.”라는 것이 이유였다.
노래를 향한 열망을 누를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집을 나와 서울 청계천 판자촌에서 생활하며 가수의 꿈을 키우려 했다. 하지만 그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내 부모님께 잡혀 돌아왔고, 안경점을 하던 사촌 형의 도움으로 ‘안경사’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는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는 법이 없었다. 안경 일이 생각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님을 깨달은 그는 “이왕이면 최고가 되자”라는 마음으로 배움에 매진했다. 당시 최고로 꼽히던 서울보건대(현 을지대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4년제가 생기자 서울산업대학(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경광학과에 편입해 학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안경사로 일하며 주 5일 강의를 듣는 것은 고된 일이었다. 안산에서 학교까지 왕복 5시간이 걸리는 통학에 안경점은 엉망이 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는 배움을 멈추지 않았고 일주일에 두 번 다니는 학교로 옮겨가면서까지 학업을 마쳤다. 이처럼 한 마리 토끼(안경사)를 잡는 일에도 전력을 다하면서 다른 한 마리 토끼(가수)에 대한 꿈도 단 한순간도 놓지 않았다. 틈틈이 작사 작곡을 하며 열정을 불태웠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쏟아부은 것이다.
“노래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
가수의 길은 험난했다. 2002년 야심 차게 준비한 첫 앨범은 쓰라린 실패로 끝났다. 경험이 없다 보니 음반만 나오면 다 될 줄 알았던 순진한 생각, 녹음비를 맡겼던 친구와의 문제, 그리고 시간에 쫓겨 하루 만에 끝내버린 녹음. 완성도가 떨어진 그 결과물은 “내 귀로도 못 듣겠다”싶을 정도였다. 그는 1집 앨범 전량을 폐기했다.
좌절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2005년 2집 이후 3집까지 꾸준히 앨범을 발표했다. 10년의 긴 무명 시절을 견디게 해준 힘은 “노래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다”라는 그 자신만의 신념이었다. 그는 “무대가 없던 시절, 박수 소리 대신 한숨이 들려오던 날에도 언젠가는 내 목소리가 누군가의 위로가 되리라는 믿음 하나로 버텼다”라고 회상했다.
초기 앨범에서 록 발라드나 댄스 등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고집했던 그는 두 번의 실패를 겪고 나서야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대중가요는 대중성이 있어야 한다. 내가 이름을 알리고 나서 내 음악을 하는 것은 몰라도 무명일 때는 대중성이 없으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렇게 대중의 반응을 고려해 ‘세미 트로트’로 방향을 틀었고, 음악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직접 작사·작곡에 참여했다. 이 유연한 변화는 그에게 운명 같은 곡들을 가져다주었다.
‘몰라 몰라’, ‘남자의 사랑’, ‘나 한번 믿어봐’ 등이 그것이다.

특히 ‘몰라 몰라’는 인연이 깊은 곡이다. 처음 듣자마자 너무 좋았지만, 작곡가에게 템포 조정을 요청한 사이 다른 가수에게 가버렸다. 3년이 지나 잊고 있을 무렵, 그 곡이 돌고 돌아 기적처럼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셔플 리듬이라 부르기엔 까다로웠지만, 중독성 강한 이 노래는 결국 그의 효자 곡이 되었다.
발라드풍의 ‘남자의 사랑’ 역시 드라마틱했다. 3집 녹음이 한창이던 가을, 격려차 방문한 작곡가 임희종이 “목소리와 딱 어울린다.”라며 들려준 곡에 가슴이 떨려 그 자리에서 바로 녹음을 결정했다. 이 두 곡의 히트로 그는 2017년 ‘제24회 대한민국 연예 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송가인과 함께 성인가요 남녀 신인상을 받으며 10년 무명의 설움을 씻어냈다.

이러한 성공은 그의 ‘본업’인 안경원에도 즐거운 변화를 가져왔다. 안산에서 운영하는 안경원에 “사랑은~ 몰라 몰라 몰라~”를 흥얼거리며 들어와 “혹시 그 가수 맞으시죠?”라며 알아보는 손님들이 생겼다. TV에서 봤다며 사인을 요청하거나, 즉석에서 노래 한 소절을 부탁하는 손님도 있다. 덕분에 안경원은 단순한 시력 교정 공간을 넘어 음악과 사람의 이야기가 오가는 따뜻한 공간이 되었다.
"돈 대신 마음을 얻은 무대, 내 철학이 되었다“
가수 정경관의 무대 철학은 ‘교감’과 ‘진심’이다. “노래는 가사의 감정을 전달하는 한 편의 영화와 같습니다. 화려한 기교보다 그 순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게 중요하죠.”
이런 그의 철학이 처음부터 확고했던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는 공연 요청이 오면 ‘개런티’부터 챙기기 바빴다. 그런 그를 송두리째 바꾼 계기가 찾아왔다. 바로 한 양로원에서의 봉사 공연이었다.
“처음에는 모두 어딘가가 불편한 분들이어서 어색하고 눈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노래가 시작되고, 불편한 몸으로 몸을 흔들고 손뼉을 치며 힘겹게 호응해 주시는 모습을 보는 순간 울컥하는 감동에 노래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눈물이 쏟아져서 노래를 잇지 못했죠.”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아~ 내 노래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힘이 될 수 있구나. 이건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구나.”
그날의 경험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그 이후부터는 봉사하는 자리의 노래는 될 수 있으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합니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그 순간 행복해지고 즐거워진다면, 그것 또한 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무대에 갈 때 마음이 오히려 더 가볍고 순수해집니다.” 돈을 받고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서는 행사 무대와 달리 봉사 무대에서는 노래를 뽐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고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오는 행복감은 그 어떤 금액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되었다.

최근에는 이런 그의 진심을 오롯이 담은 신곡 ‘어머니’를 발표했다. 95세 노모를 향한 막내아들의 고백이자 감사의 노래다. 그가 직접 쓴 가사에는 어머니의 희생과 자식의 뒤늦은 후회가 절절히 담겨있다.
“아버지는 해외에서 공부도 하시고 정치를 하셨지만, 저희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셔서 한글도 모르셨습니다. 평생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셨죠.”
“어르신들 앞에서 이 곡을 부를 때면 제 이야기이자 모든 분의 이야기가 되어 함께 눈시울을 붉히곤 합니다. ‘철들어 돌아보니 갚을 길이 없네~’라는 후렴처럼 늦었지만, 어머니께 진심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경계 허무는 만능 엔터테이너 꿈꾸다!
그의 도전은 음악에만 그치지 않는다. 관악 FM 라디오 ‘정경관의 추억의 음악다방’을 진행하며 MC로도 활약했고, 연기에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비록 준비하던 작품이 제작사 사정으로 무산되기도 했지만, 그의 도전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흥미로운 이력은 또 있다. 바로 연세대학교 정경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것이다. “사실 주변의 끈질긴 정치입문 권유를 피해 보려고 간 것도 있습니다. (웃음) 막상 가보니 국회의원, 시장 등 많은 분을 만났지만, 정치는 제게 맞지 않더군요. 저 같은 사람은 정신질환이 올 것 같더라고요.”
이처럼 다방면의 경험은 그를 ‘만능 엔터테이너’로 성장시켰다. 라디오 DJ 경험은 청취자와의 깊은 소통을 통해 가수로서 표현력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안경사로서의 전문성을 놓지 않기 위해 그리고 ‘배워야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라는 철학 아래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
키높이 신발을 신고 무대 위에서 격렬하게 뛰어다니다 보니 무릎 상처를 입어 수술을 받으면서 공연을 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관객과 함께 즐기고 호흡할 수 있는 무대’를 포기할 수 없다. 삶의 이야기를 담은 음악, 다양한 장르가 융합된 현대적인 트로트를 통해 대중과 깊은 정서적 연결을 이어가는 것이 그의 목표다.
안경사로서 그리고 가수로서 전혀 다른 두 세계의 경계를 허물며 ‘소통’이라는 하나의 길을 걷고 있는 정경관. 그의 삶은 안경을 통해 세상을 밝히고 노래를 통해 마음을 밝히는 그 자체로 한 편의 감동적인 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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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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