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건축가들이 가장 흠모하는 한국 건축물
원칙과 실용성, 유교 정신을 녹여낸 ‘조선 그 자체’
제사, 음악, 무용이 함께있는 종묘제례
눈덮힌 종묘 '정전' / 사진 출처 = 궁능유적본부
“건축으로 이렇게 고요하면서 경건한 공간을 만든 건 기적에 가깝다. 이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곳을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파르테논 신전 정도일까?”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2012년 2명의 아들 부부와 함께 세계적인 건축물을 보기 위해 종묘를 방문하면서 한 이야기이다.
프랭크 게리는 LA 월트디즈니 콘서트홀, 매사추세츠공대(MIT) 건물, 스페인 빌바오시의 구겐하임 미술관 등 파격적이고 기괴한 설계로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비롯해 각종 건축상을 수십 차례 수상했고, 미국 정부가 수여하는 국민예술 훈장을 받았다.
프랭크 게리(좌)와 그의 작품 <LUMA Arles_프랑스 2016년>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계비), 추존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국가의 사당으로 법궁인 경복궁을 짓고 왼쪽(동쪽)에 종묘를 두었다. 종묘의 중심 건물인 정전은 단일 건물로는 101m의 긴 목조건물로 앞에는 가로 109m, 세로 69m의 월대(月臺, Platform)가 있다.
이는 신위가 늘어날 때마다 증축했기 때문인데 정전 19실과 별채 격인 영녕전 16실에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종묘 안내도
먼저 종묘의 정문(외대문)인 ‘창엽문(蒼葉門)’은 조선의 개국 공신 정도전이 붙인 이름으로 ‘잎이 푸르게 나무가 자라나는 것처럼 조선 왕조가 번창하고 융성하기를 바란다.’라는 뜻이다.
공교롭게도 ‘푸를 창(蒼)’의 획수 14획, ‘잎 엽(葉)’의 획수 13획을 합치면 총 27획이다. 조선의 왕도 27대에서 끝이 났다. 마치 정도전이 예언이라도 한 듯.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창엽문)'
정문을 지나면 세 개의 길 ‘삼도’가 나온다. 가운데 높은 길이 역대 왕들의 혼령(신), 향, 축문이 다니는 ‘신도’, 왼쪽이 임금의 ‘어도’이고, 오른쪽 길이 ‘왕세자의 어도’이다.
돌을 반듯하게 하지 않고 얇고 넓적하게 깔아 뒤죽박죽처럼 보이지만, 자연 그대로의 모양으로 훨씬 미학적이다. 신하들이나 제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이 삼도 밖의 길을 걸어야 했다.
삼도(좌)와 망묘루 연지
먼저, 삼도로 가지 않고 오른쪽에 있는 ‘망묘루(望廟樓)’는 종묘 관원들이 업무를 보는 곳으로 ‘제사 전 선왕들을 생각하며 머문다.’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옆으로는 제사에 사용될 향과 축문 등 제물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머물던 ‘향대청(香大廳)’이 자리하고 있다.
망묘루 전경
그리고 이들 뒤로 의외의 공간이 하나 있는데 고려 ‘공민왕’의 신당이다. 조선 왕들의 신위를 모시는 곳에 고려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니? 다소 의아스럽다.
신위(신주)는 없는 것으로 봐서는 제사를 지내지는 않지만, 특이한 점은 영정 사진에서 공민왕은 원나라 사신의 옷에 손에는 ‘홀’을 들고 있는 전형적인 원나라 사신의 모습이다.
공민왕 신당 입구(좌)와 공민왕과 노국공주 영정(우)
이곳은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만들어졌는데,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 자신들이 무너뜨린 전 왕조에 대한 존중과 계승, 그리고 은근히 비아냥(디스)을 통해 새로운 왕조 건립의 당위성과 역사적, 시대적 대의명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당시 실패하면 역모, 성공하면 난세의 영웅이 되었던 것처럼 고려 왕씨 왕조를 몰아내고 이씨 왕조를 세운(역성혁명) 태조 이성계에게도 이 부분이 ‘아킬레스건’이었을 것이다.
본채인 ‘정전’으로 가기 바로 전 특이한 건물 ‘재궁’은 임금이 세자와 함께 하루를 지내면서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북쪽에 왕이 있었던 어재실, 서쪽에 목욕재계로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는 어목욕청, 동쪽에 세자가 머무는 세자재실이 있다. 망자를 위한 공간인 종묘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공간이다.
보통 중요한 의식을 앞둔 사람에게 ‘목욕재계(沐浴齋戒) 후’라고 하는데 왕과 세자도 제사를 지내기 바로 전 목욕재계 한 것이다.
참고로, 왕은 제사 전 7일간 매일 목욕재계를 했는데 6일은 궁궐에서, 마지막 하루는 종묘에서 했다. 이 기간 술도 먹지 않았고, 여자들과 잠자리도 하지 않았고, 음악도 듣지 않았고, 문병과 문상은 물론 심지어 사형집행 문서에 서명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종묘제례가 왕에게는 얼마나 크고 중요한 행사인지 알 수 있다.
재궁 전경 어목욕청(좌), 어재실(중앙), 세자재실(우) / 사진 출처 = 궁능유적본부
정전의 동문에 있는 ‘전사청’은 제사 음식을 마련하는 곳으로 평소에는 제사용 집기들을 보관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종묘에 여성이 출입할 수 없어 요리도 남자들이 했다. 단, 숙종 때는 예외적으로 여자 요리사들이 출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찬막단’에서는 제사에 바칠 40여 가지의 음식을 상에 올리고 검사하며, ‘성생단(희생단)’에서는 살아있는 돼지, 소, 염소 등이 제물이 될지, 안 될지를 판단하는 곳으로 흠집 없이 잘 자란 짐승만 제물로 사용했다. ‘제정’이라는 우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
전사청 전경, 찬막단(중앙), 성생단(우) / 사진 출처 = 궁능유적본부
동문을 통해 정전으로 들어가면, 이중 월대(하월대, 상월대)를 만난다.
사람의 허리 만큼에서 시작되는 상월대는 정전을 좀 더 우러러보고 경건할 수 있게끔 높여 놓은 것이다.
상월대로 올라가는 계단 난간의 구름 모양 소맷돌은 ‘천계(하늘나라)’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구름모양의 소맷돌
어떤 왕은 정전에 계시고 어떤 왕은 영녕전에 모셔질까?
왕이 다스리는 제후국에서는 종묘를 지을 때는 4대 조상과 태조까지 해서 5실(황제국은 7실)만 지었다.
태조 이성계도 본인 위로 4대 조상(고조부까지)과 본인까지 5실만 필요했는데 2실의 여유를 둬서 7실로 시작했다. 그리고 대수가 찬 왕의 신주는 땅에 묻는 것이 원칙이나, 세종대왕 때 “어떻게 조상님을 그렇게 할 수 있느냐?”라는 의견에 따라 대수가 찬 왕의 신위는 영녕전으로 옮겨 제향(조천)하도록 했다.
정전의 19명(실), 영녕전에 16명(실) 해서 총 35명의 왕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는 것인데 조선의 왕은 27명이고 연산군과 광해군은 폐위되어 신주가 없는데 그렇다면 나머지 10명의 왕은 누구일까?
우선, 왕위에 오른 적이 없지만, 태조 이성계의 직계 조상이다.
‘효’를 중시하는 유교 국가 조선이었기에 본인을 포함한 5대까지를 제사의 당사자로 보고 본인을 뺀 직계 4조까지 신주를 모셨다. 그리고 나머지 6명은 임금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왕으로 추존된 추존왕이다.
본채인 '정전(正殿)' 감상 포인트 4가지
종묘의 본채 국보 '정전' / 사진 출처 = 궁능유적본부
1. 한 번에 지은 것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확장된 건물
정전은 망자들의 공간이라 서쪽이 상석이므로 서쪽(왼쪽)을 시작으로 동쪽으로 확장되었는데 7실로 시작해서 명종 때에는 11실, 영조 때 15실, 그리고 헌종 때 19실로 확장되었다. 전 세계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건물이 자라는 곳은 정전과 영녕전밖에 없다.
2. 완벽한 ‘반복과 대칭’을 맞추기 위해 증축과 함께 중앙 계단을 끊임없이 이동
맨 왼쪽 태조 이성계의 신실을 기준으로 4칸씩 똑같이 증축했는데, 심지어 혼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비틀어 놓은 신실의 틈까지도 완벽히 똑같게 만들었다. ‘대칭’이라는 건축 철학에 맞게 중앙 계단을 끊임없이 떼어내고 붙인 흔적을 볼 수 있다.
3. 실용을 위해 ‘반복과 대칭’이라는 원칙을 의도적으로 깨다!
‘ㄷ’자 모습의 정전에 서월랑과 동월랑은 완벽한 대칭이지만 서로 기능이 달랐기에 서월랑은 폐쇄형으로 동월랑은 개방형으로 지어져 있다. 서월랑은 제기 용품들을 보관 관리하고, 동월랑은 제례 중 비, 눈, 바람 등 날씨 악천후를 피하기 위한 공간으로 지어졌다.
서월랑(폐쇄형)과 동월랑(개방형)
4. 정전에만 있는 공신당
정전 울타리 남쪽에 16실의 ‘공신당’은 조선의 개국 공신부터 충신들의 신위를 모셔 놓은 곳이다.
‘충’, ‘효’, ‘군신’ 간의 예를 중요시했던 조선이었기에 공신당의 위치 또한 정전에서 한참 멀리 물러 앉아있고, 하월대 아래에 낮게 자리하고 있다.
정전의 공신당 / 사진 출처 = 궁능유적본부
※ 종묘 정전에 신위가 있는 19명의 조선 왕
태조 / 태종 / 세종 / 세조 / 성종 / 중종 / 선조 / 인조 / 효종 / 현종 / 숙종 / 영조 / 정조 / 순조 / 문조(효명세자, 순조의 아들이자 헌종의 아버지) / 헌종 / 철종 / 고종 / 순종
별채 영녕전(永寧殿)
영녕전은 태조 이성계의 4대조와 12명의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공간이다.
정전보다 규모가 좀 작지만, 반복과 대칭이라는 건축 원리를 지키고, 심지어 서월랑, 동월랑도 똑같다.
하지만, 영녕전에는 공신당이 없다. 영녕전에 모셔진 왕들이 아무리 임팩트 없고 존재감이 미미한 왕들이라고 해도 살아생전 공신이 한 명도 없었던 건 아니다.
영녕전 전경 / 사진 출처 = 궁능유적본부
‘조선’다운 이유가 있는데, 가장 상석인 중앙에 모셔진 태조 이성계의 4대조는 실제로 왕이 아닌 추존왕으로 당연히 공신이 없기에 영녕전에 모셔진 다른 왕들도 별도로 공신당을 만들고 배향할 수 없었다.
영녕전에 신주가 있는 왕은 대부분 사연이 있는데, 정종(태종이 무서워 왕에서 물러남), 문종(재위 기간 2년 이하), 단종(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 장조(사도세자) 등 존재감이나 임팩트가 없거나 수명이 짧아 충분한 업적을 쌓지 못했던 왕들이다.
재위 기간이 길어도 예종, 명종, 경종처럼 본인의 제사를 지내 줄 아들, 즉 임금이 없다는 점이 영녕전으로 오는 사연이었다.
정전과 영녕전의 차이점을 통해서 “아! 이래서 조선이구나”하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26대 순종과 27대 고종은 나라가 망했음에도 정전에 신주가 모셔져 있다. 평소 큰 공이 있는 분의 위패를 옮기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모시는 ‘불천지위’를 논해야 하지만, 조선 왕조가 망하면서 별다른 논쟁 없이 정전에 계속 모셔진 것이 아닐까?
※ 종묘 영녕전에 신위가 있는 16명의 조선 왕
목조 / 익조 / 도조 / 환조 / 정종 / 문종 / 단종 / 덕종(월산대군, 예종의 형) / 예종 / 인종 / 명종 / 원종(선조의 아들, 인조의 아버지) / 경종 / 진종(효장세자, 영조의 큰아들) / 장조(사도세자) / 영친왕
종묘제례(악)
정전의 위패는 1년에 한 번 종묘제례 때만 개방한다.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제사와 음악, 무용 그리고 유교라는 정신이 있는 종묘제례는 매년 5월 첫 번째 일요일에 근엄한 ‘종묘제례악’과 함께 연주된다.
‘종묘제례악’은 ‘정대업’과 ‘보태평’에 맞춰 64명의 무용수가 ‘팔일무(가로*세로 8*8)’를 춘다.
‘일무’는 줄 서서 추는 춤이고, ‘정대업(대업을 안정시켰다)’은 조상의 무공을 칭송하고 ‘보태평(태평성대를 이룬다)’은 조상의 문화를 칭송하는 음악이다.
세종대왕이 막대기로 땅을 두드려 가면서 하루 만에 만든 노래로 조선의 건국과 왕조 발전에 공헌한 선조들의 문화적 업적과 군사적 공로를 칭송하는 것이다.
종묘제례 및 팔일무
종묘제례는 일제강점기에는 지내지 못했지만, 김천흥, 장사훈, 이혜구 같은 음악인들이 악보도 만들고 연습도 시키는 등 피나는 노력과 열정으로 지켜냈다. 중국이 문화대혁명으로 문화를 박살 내면서 없어졌던 종묘제례를 최근 복구하면서 우리의 종묘제례를 배워가고 있다.
원래 종묘는 창덕궁, 창경궁과 함께 한 공간에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창덕궁과 종묘 사이를 가로지르는 도로가 놓이면서 두 공간으로 분리되었다가 최근에 복원되었다.
1995년에 ‘종묘’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2001년에 ‘종묘제례(악)’가 인류무형문화유산, 그리고 종묘에 보관했던 ‘조선왕실 어보(임금의 도장)’와 ‘어책(임금의 책)’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종묘 입구의 ‘하마비(下馬碑)’는 말이나 가마에서 내리라는 표시를 한 비석이다. 각 궁궐의 정문 밖, 종묘 입구에 세웠으며 성균관을 비롯한 각 지방의 문묘 밖 홍살문, 서원 앞에 하마비를 세웠다.
말에서 내려 걸어가는 것이 이들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이자 예에 합당했기 때문이다. 내리는 지점도 품계에 따라 1품 이하는 궐문으로부터 10보, 3품 이하는 20보, 7품 이하는 30보 거리에서 말에서 내려야 한다고 되어 있다.
임금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마비
조선은 원칙과 실용성을 함께 추구하면서 유교의 기본이념과 철학을 완벽하게 종묘에 녹였다. 그래서 ‘종묘가 바로 조선 그 자체’라고 불리고 있는 이유이다.
과연, 우리는 지금 현대 건축물에 이렇게 우리의 시대정신을 담아내고 있을까?
배성식 / 여행작가
평소 여행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 한국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모아 2022년에 아빠들을 위한 주말 놀거리, 먹거리 프로젝트 <아빠와 함께하는 두근두근 보물찾기>를 발간하였다.
2024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 최대의 언론사 그룹인 여행요미우리출판사를 통해 한국의 관광명소와 외국인들이 꼭 경험해 볼 만한 곳들을 소개한 ‘한국의 핫 플레이스 51’을 일본어 <韓国のホットプレイス51>로 공동 발간했다.
이메일 ssbae100@naver.com / 인스타그램 @k_stargram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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