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목사가 무슨 뽕짝이냐며 말들 많지만, 예수님이 노래했다면, 그것은 ‘트로트’였을 겁니다”

박강민 기자

등록 2025-10-22 12:31

“낮은 곳, 촌 동네에 계셨던 예수님이 고상한 가곡이나 팝을 부르지 않았을 것”

세상의 편견 깨고, ‘트로트찬양’ 개척...“내 꿈은 내 노래가 찬송가로 등록되는 것”

[인터뷰] ‘하나님의 뽕짝 가수' 구자억 목사


사진 = 트롯뉴스


‘나는 하나님의 뽕짝 가수’입니다!

구자억 목사가 스스로 지었다는 이 별명에는 그 어떤 수식어보다 깊은 신학적 고찰과 사명이 담겨 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과 ‘목사’라는 직분이 세운 신분의 벽을 ‘뽕짝’이라는 가장 대중적이고 친근한 언어로 허물겠다는 선언이다.

“‘트로트’라고 하면 조금 뽐내는 말 같지만, ‘뽕짝’은 더 친근하고 부드럽게 다가오잖아요. 하나님, 종교, 목사…. 이런 단어들은 사람들에게 벽을 느끼게 합니다. 저는 그 벽을 허무는 가벼움이 좋습니다. 무겁고 엄숙한 것보다 훨씬 낫지요.”

 

2009년 처음으로 트로트를 부르기 시작한 이후 “목사가 무슨 뽕짝이냐”, “교회가 카바레냐”는 숱한 비판과 조롱 속에서도 그는 꿋꿋이 ‘트로트찬양’이라는 외길을 걸어왔다. Mnet ‘트로트엑스’ 무대에서 세상의 편견을 깨기 위한 첫발을 내디뎠고 이후 5개의 정규 앨범을 내며 꿋꿋하게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한 구자억 목사. 그가 트로트라는 ‘창문’을 통해 세상에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성육신(成肉身), 낮은 곳으로 임한 복음의 실천


일본 아야세 동부교회 2023년


구자억 목사에게 ‘트로트’와 ‘찬양’의 결합은 단순한 음악적 욕심에서만 나온 시도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성육신(Incarnation)’의 실천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성육신’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 그 사랑 때문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기독교의 기본 근간에는 ‘낮아짐’이 깔려 있습니다. 기독교는 고상하지 않고 담을 쌓지 않습니다.”

그는 이 ‘낮아짐’의 신학을 트로트에서 발견했다. 만약 예수가 지금 이 시대에 노래를 불렀다면 어떤 장르를 택했을까? 구 목사는 망설임 없이 ‘신민요나 트로트’였을 것이라 단언한다.


“당시 나사렛 촌 동네에서 목수 일을 하시던 분이 가곡이나 팝을 부르셨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장 대중적이고, 사람들의 삶 가장 가까이에 있는 노래를 부르셨겠죠. 제가 궁극적으로 던지고픈 메시지는 기독교의 복음이지만, 제가 전하는 방식이 트로트인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그의 사역 초기 경험에서 비롯됐다. 신학생 시절, 청소년 사역에 매진하던 그는 문득 교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발견했다. 바로 ‘여 선교회 성도님들’, 즉 어머니 세대였다. 청소년들은 최신 CCM(현대 기독교 음악)에 열광했지만, 정작 평생 교회를 지켜온 어르신들은 그 열기에서 한발 비켜나 있었다.

“그분들을 위한 찬양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분들이 평생 울고 웃으며 위로받고 감동 받아온 음악, 그들의 삶에 가장 익숙한 리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나훈아를 좋아하는 아들과 ‘특별한 뮤즈’ 어머니

 

구자억 목사의 음악적 뿌리는 ‘어머니’다. 

나훈아의 열렬한 팬이었던 어머니 덕에 그는 “어릴 적엔 세상에 노래가 나훈아 선생님 노래밖에 없는 줄 알았다”고 회상한다.

 

“어머니가 하루는 나훈아 선생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그 옆에서 어린 제가 ‘울지마 울긴 왜 울어~’를 불렀다고 해요. 꼬마 아이가 그러니 귀여우셨겠죠. 그렇게 제 삶에 굵직한 부분마다 나훈아 선생님의 음악이 녹아 있습니다.”

“어머니는 나의 음악적 뿌리이자, 지금도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인 ‘특별한 뮤즈’입니다”. 구 목사의 노래 가사 상당수는 어머니와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탄생했다.

“한번은 제가 ‘엄마, 나이가 몇이지?’ 하고 질문하니 ‘나이를 왜 물어. 나는 나이를 잊고 살아’ 하시더군요. 그 말이 그대로 ‘나는 나이를 잊고 살아갈래요’라는 가사가 됐습니다. 또 한 번은 같이 산에 올랐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나이야 가라~~’ 하고 외치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나이야 가라 가라~’라는 곡이 됐죠.”


싱글앨범

 

어머니 세대의 감성과 그들의 소망을 가장 가까이에서 배운다. 신곡이 나오면 가장 먼저 어머니께 들려드리지만, 돌아오는 평가는 여전히 냉철하다. “노래는 좋은데…. 나훈아 선생님 따라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어머니의 이 한마디는 그에게 트로트를 대하는 자세를 끊임없이 가다듬게 하는 원동력이자, 나훈아, 조용필처럼 “그 나이까지 무대에서 노래하고 싶은” 롤모델을 쫓게 하는 힘이다.

 

 

 ‘끼’와 거룩한 소명의 만남 ‘트로트찬양’

 

어릴 적부터 그의 꿈은 확고했다. “저는 목사가 될 거예요.”

위암으로 투병하시던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지만, 그것은 분명한 소명이었다. 하지만 그 소명만큼이나 강력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주체할 수 없는 ‘끼’였다.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시장을 못 가셨대요. 시장만 가면 갑자기 사라져서 리어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테이프 앞에서 제가 춤을 추고 있었대요. 사람들이 구경하느라 모여드니 테이프 파는 분은 좋아하셨지만, 어머니는 창피하셨겠죠.(웃음) 그런 끼가 있었던 것 같아요.”


 '대전 영락교회' 이웃초청 트로트찬양집회 2023년 


이 주체할 수 없는 구 목사의 ‘끼’는 2007년, 신학대학원 시절 ‘트로트찬양’이라는 소명과 만나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 2009년 첫 음반을 내고 사역을 시작했지만, 현실의 벽은 상상 이상으로 차갑고 높았다.

“2009년만 해도 지금처럼 트로트가 대중적인 찬사를 받는 장르가 아니었습니다. 소위 ‘싸구려 음악’ 취급을 받았죠. 교회에서 트로트를 부르다가 끌려 내려온 적도 있습니다.”

 

그에게 쏟아진 가장 아픈 비판은 세상이 아닌 교회 안에서 나왔다. “‘교회가 카바레냐’는 말부터 입에 담기 힘든 악성 댓글들이 쏟아졌습니다. 그때는 안 좋은 댓글이 90% 이상이었어요. 차라리 목회자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한 적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신학 공부가 없었다면 지금의 노래들도 없었을 것이라 단언한다. 현재 저작권협회에 등록된 100여 곡의 자작곡은 모두 ‘목사’ 구자억이기에 쓸 수 있는 노래들이었다. “목사라는 신분 때문에 받는 부담감은 감내하고 가야 할, 평생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이라고 그는 고백한다.

그를 버티게 한 힘은 어머니의 기도, 그리고 “내가 이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특정 인물이나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었다.

 

 

‘트로트엑스’출연을 통해 세상의 벽을 깨다


'트로트 엑스' = Mnet


교단 목사님들의 비판과 차가운 시선 속에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던 그에게 2014년 Mnet 방송에서 진행한 ‘트로트엑스’ 출연은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목사 가운을 입고 무대에 올라 ‘참말이여’를 부른 그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참말이여’는 사실 기독교의 본질, 어찌 보면 교리가 녹아 있는 노래입니다. 그것을 방송에서 풀어낼 수 있었던 건, 장르와 컨셉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죠.”

무대를 마치고 내려왔을 때, 한 촬영 스태프가 그에게 건넨 말은 구 목사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그의 사역의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특정 종교인이 나와서 특정 종교의 교리를 음악이 되었건 무엇이 되었건 공중파 방송에서 전하는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없을 겁니다.’ 그 말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아, 이것이 음악의 힘이고, 컨셉의 힘이구나.”

 

방송 이후 쏟아진 ‘이 노래 듣고 교회에 가고 싶어진다’라는 댓글들은 그에게 가장 큰 확신을 주었다. 이것이 정말 ‘전도’가 되는구나. 트로트라는 장르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그는 심지어 사찰 법당 안에서도 두 차례나 노래를 불렀다.

“전남 구례 화엄사에서 ‘김 집사가 돌아간다’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사에 ‘예수님이 두 팔 벌려 기다리신다’는 내용이 있는데도, 그들은 저를 ‘가수’로 초대했기에 열린 마음으로 들어주셨습니다. 트로트가 아니었다면 교회 울타리를 넘어설 수 없었겠죠.”

 

 

“하늘이 보내준 ‘천사’이자 ‘동역자’인 아내는 나의 힘”




구자억 목사의 무대에는 언제나 든든한 지원군이 함께한다. 매니저, 코디, 백댄서까지 1인 3역을 소화하는 아내 신승주 씨다.

“저는 아내를 ‘하늘이 제게 보내주신 천사’라고 부릅니다. 빈말이 아니에요.”

내성적인 성격 탓에 처음에는 무대에 함께 서길 망설였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든든한 ‘부부 사역단’의 파트너가 되었다. 이전에도 사역을 돕는 이들은 있었지만, 각자의 사정으로 오래 함께하지 못했다.

“평생 나의 곁에서 함께 해주는 소중한 사람이 이렇게 동역해주니 더없이 행복하고 든든합니다. 제 노래에 맞춰 체조나 춤을 만드는 것도 아내와 함께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노래를 한 번이라도 더 듣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죠. 그런데 요즘은 저보다 아내 인기가 더 많아져서 그게 고민입니다.(웃음)”

 

코로나 시절에는 노래할 무대가 없어 부부가 함께 ‘달덩이 베이글’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지금은 사역이 바빠져 잠시 휴업 중이지만, 그 시간마저도 부부에겐 소중한 동행의 추억이다. 아내는 구 목사가 무대 위에서 오롯이 사역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가장 큰 버팀목이다.


사진 = 트롯뉴스


화려한 기교는 빼고 ‘가사’에 신학을 담다

 

구자억 목사는 15년간 5개의 정규 앨범을 내며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그의 음악적 핵심은 기교나 화려한 멜로디가 아닌 ‘가사’에 있다.

“멜로디는 사실 제가 오래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 담백하게 쓰는 편입니다. 기교 부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요. 하지만 가장 많이 공을 들이는 부분은 단연 내 뜻을 담기 위한 ‘가사’입니다.”

장르의 특성상 수많은 신학적 공격을 받아왔기에, 가사는 그의 정체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가사가 희미해져 버리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트로트찬양의 가사는 되도록 선명하게 표현하려 합니다. 이렇게 들으면 이런 것 같고, 저렇게 들으면 저런 것 같은 애매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담아내려 하죠.”


최근에는 대중을 위한 일반 가요도 부른다. ‘나이야 가라 가라’, ‘웃어봐라’, ‘약장수’ 같은 곡들이다. 이는 인지도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초대된 행사에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함이다.

“교회 관련 행사에 교인이 아닌 분들을 초대해놓고 계속 찬양만 부르면 그분들이 지치시잖아요. 그분들에게 이미자, 나훈아 선생님 노래도 불러드리지만, 이왕이면 제가 만든 좋은 가사의 대중가요로 더 편안하게 다가가고 싶었습니다. 노래하는 자리가 교회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의 활동 반경은 교회가 70% 대중 무대가 30% 정도다. 제주 평화음악회, 지역 축제 등 종교와 관계없는 무대에도 선다. 그는 이것이 신앙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연결’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신앙은 제 안의 생명력이고, 예술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어떻게 연결 지을까를 고민해야죠.”

 

 

제대로 된 트로트 사역을 위해 실용음악 연구 

 

10년 넘게 현장에서 활동해 온 그가 최근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바로 실용음악 박사과정이다. 학부와 석사 모두 신학을 전공했던 그에게 음악에 대한 학문적 갈증이 찾아왔다.

“트로트를 하면 할수록 트로트를 더 깊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사, 석사를 모두 신학만 하다 보니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죠. 단순히 노래를 잘하는 것을 넘어, 이 장르의 역사와 변천 과정을 알아야 제 사역을 더 잘 지켜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트로트가 어떻게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렀는지, 유성기 음반 시절 ‘신민요’와 ‘유행가’가 어떻게 양대 산맥을 이루었는지, 그리고 황금심, 이난영 등 초기 가수들의 가창법은 어떠했는지 등을 연구하고 있다.

“트로트의 머리(학문)와 트로트의 가슴(음악)을 함께 가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트로트를 깊이 연구해서 좋은 논문도 쓰고, 트로트를 학술적으로도 소개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는 트로트가 자신에게 ‘세상을 보게 해준 창(窓)’이라고 정의했다.

“만약 이 사역을 안 했다면, 저는 평범한 목사로 교회 안에만 머물렀을 겁니다. 늘 만나는 사람들만 만났겠죠. 하지만 트로트 덕분에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많은 분을 만나고, 이렇게 트롯뉴스와 인터뷰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예수님도 회당 안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바닷가로, 산으로 다니시며 믿음 없는 이들을 만나셨거든요. 트로트가 저를 예수님의 길로 가게 해준 셈입니다.”

 

 

마지막 꿈 “내 트로트찬양이 찬송가에 실리는 것”

 

‘하나님의 뽕짝 가수’ 구자억 목사의 다음 사명은 무엇일까. 그는 ‘후진 양성’이나 거창한 계획 대신, 그저 ‘오래오래 노래하는 것’이라 답했다.

“크든 작든 무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5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사람들이 ‘아, 트로트 부르는 구자억 목사라는 사람이 있었지’ 하고 기억되고, 그때도 여전히 노래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평생의 소원이자 가장 큰 꿈이 하나 있다.

“제 트로트찬양이 우리나라 공식 ‘찬송가’에 수록되는 것이 제 가장 큰 꿈입니다. 지금 찬송가는 대부분 서양 악곡이라 우리 정서와 맞지 않는 부분도 있거든요. 거의 100년 가까이 한국인들의 희로애락과 함께해 온 트로트가 성도님들과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노래가 찬송가에 실린다는 것은, 이 장르가 기독교 안에서 드디어 대표성을 갖게 된다는 의미니까요. 그날을 위해 지금도 좋은 노래를 계속 작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독자들에게 “종교 때문에 세상이 웃어야 하고 밝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래는 누군가 들어주는 분들이 있기에 존재합니다. 제가 가진 재주가 노래하는 재주입니다. 이 달란트를 가지고 세상을 웃게 하고 밝히는 데 힘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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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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