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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카_이시카와 사유리] 기교를 넘어선 품격… 비극 조차 예술로 승화시킨 '엔카의 자존심'

박강민 기자 oasis365@gmail.com

등록 2026-02-02 12:26

무명 아이돌에서 ‘쓰가루 해협~’으로 일약 국민가수 등극

과도한 신파 배제, 목소리에 실린 무게감으로 대중 압도

‘히바리’가 천재였다면 ‘사유리’는 전통을 갈고닦은 장인

□ 일본을 울린 엔카 스타 10인 / ② 정통엔카 정점 이시카와 사유리(石川さゆり)

 

대한민국 대표 트로트 전문미디어 ‘트롯뉴스(www.trotnews.co.kr)’가 전하는 ‘트로트 세계화 원년’을 맞이한 2026년 신년 특별 기획시리즈 ‘일본을 울린 엔카 스타 10인’ 두 번째 시간이다.

지난 회에서는 일본 대중음악의 영원한 태양, ‘미소라 히바리’를 조명했다. 오늘 만날 인물은 그 태양이 진 뒤, 엔카라는 거대한 성벽을 홀로 지켜내며 ‘정통엔카의 완성’이라 불린 여인이다. 기교를 넘어선 품격, 비극조차 예술로 승화시킨 이시카와 사유리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음악 세계를 탐구한다.


이시카와 사유리(石川さゆり) 공식 홈페이지

J-POP 열풍 속에도 고집스럽게 엔카 지켜

 

매년 12월 31일, 일본 온 가족이 모여 시청하는 ‘NHK 홍백가합전’. 이 무대에 무려 45회 이상 출연하며 역대 최다 출연 기록을 경신 중인 가수가 있다. 바로 이시카와 사유리다.

미소라 히바리가 ‘하늘이 내린 천재’였다면, 이시카와 사유리는 ‘전통의 가치를 갈고닦은 장인’에 가깝다. 

시대가 변하고 제이 팝(J-POP)이 열도를 점령했을 때도 그녀는 고집스럽게 기모노 깃을 여미며 무대 위에 섰다. 사람들은 그녀를 통해 엔카의 자존심을 확인했고, 그녀의 목소리에서 일본 대중음악의 가장 깊은 뿌리를 발견했다. 

유행을 쫓지 않았기에 오히려 유행되어버린 여인, 이시카와 사유리의 드라마틱한 서사는 여기서 시작된다.

  

4년의 무명 생활 중 운명 같은 곡 만나다

 

1958년 구마모토에서 태어난 이시카와 사유리의 시작은 의외로 평범했다. 

어릴 때부터 가수가 꿈이었던 그녀는 운전기사로 일하던 아버지가 딸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구마모토에서 멀리 떨어진 요코하마로 이사를 하는 헌신적 도움을 받는다. 아버지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매월 5000엔의 레슨비를 지원해 주었고 사유리도 아버지의 부담을 덜기 위해 새벽 우유배달을 하면서 가수의 꿈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같은 학원에서 레슨을 받던 친구가 참가 신청을 냈던 ‘가요대회’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자 대타로 출전해 합격하게 되었고, 연예기획사에 스카우트가 되어 드디어 꿈에 그리던 가수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처음엔 가수가 TV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그래도 가수의 꿈은 그녀가 가야 할 길이었기에 포기하지 않았다.


숨바꼭질(かくれんぼ) 앨범

1973년 ‘호리프로 세 소녀(ホリプロ三人娘)’라는 유닛을 결성하여 일본 컬럼비아에서 발매한 ‘숨바꼭질(かくれんぼ)’을 통하여 아이돌 가수로 데뷔한다. 15세의 나이로 드디어 꿈에 그리던 가수에 데뷔할 당시 그녀의 콘셉트는 ‘청순한 아이돌’이었다. 짧은 치마를 입고 경쾌한 노래를 불렀지만, 냉정한 대중은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당시 ‘꽃의 중3 트리오’로 큰 인기를 끌었던 ‘야마구치 모모에’, ‘사쿠라다 준코’, ‘모리 마사코’ 같은 스타들의 그늘에 가려, 그녀는 4년 동안 무명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1977년, 운명 같은 곡이 그녀를 찾아온다.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가수 등려군의 노래 파트너로 유명한 미키 타카시(三木たかし, 1945~2009)가 작곡한 그 유명한 ‘쓰가루 해협 겨울 풍경(津軽海峡・冬景色)’이다. 

사랑을 잃은 한 여인이 도쿄 우에노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북쪽 끝 아오모리현의 아오모리 역에 내려 쓰가루 해협을 건너 고향인 북해도(홋카이도)로 향한다. 밤새 달려 북쪽 끝(북해도)에 도착하니 아오모리역은 눈 속에 파묻혀있고…. “사랑이여 나는 돌아갑니다.”라는 추운 겨울 쓸쓸함의 극치를 표현한 노래이다. 이 노래는 발표가 되자마자 일본 전역을 뒤흔들었다.


쓰가루 해협 겨울 풍경(津軽海峡・冬景色) 앨범

 

쓰가루 해협 겨울 풍경(津軽海峡・冬景色)

 

“우에노발 야간열차에서 내릴 때부터,

아오모리역에는 눈이 내리네요.

북녘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도 말이 없고,

 

파도 소리만 듣고 있네요.

 

나도 홀로 연락선을 타고,

추위에 떠는 갈매기를 발견하고 울고 있었죠.

아아 쓰가루 해협의 겨울 풍경이여.

 

"봐, 저게 닷피곶, 북쪽의 끝"이라고

모르는 사람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네요.

입김으로 흐려진 유리창을 닦아 봐도,

아득히 멀리 희미한 안개만 보일 뿐.

 

안녕히, 그대여. 저는 돌아갑니다.

바람 소리가 가슴을 흔들어 울고만 있는,

아아 쓰가루 해협의 겨울 풍경이여.~”


‘트로트와 엔카’의 저자, 가천대 박진수 교수(아시아문화연구소 소장)는 이 노래에 대해 “이별한 여인이 떠나지만, 가사는 슬픔을 직접 말하는 대신 ‘저기 홋카이도가 보인다.’, ‘갈매기가 운다.’라고 풍경을 묘사한다.”라며 “이는 일본 특유의 ‘시부이(渋い·수수하고 절제된) 미학’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노래”라고 설명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 고작 19세. 그 어린 나이에 이별의 시린 상처를 담담하면서도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소화해 내자 일본인들은 전율했다.

그녀는 이때 깨달았다. 자신의 목소리는 가벼운 유행가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정통엔카’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곡 하나로 그녀는 단숨에 국민 가수의 반열에 올랐고, ‘아이돌 사유리’는 죽고 ‘예술가 사유리’로 다시 태어났다.

 

 

엔카를 문학의 경지로 ‘아마기고에(天城越え)’

 

이시카와 사유리를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곡이 1986년 발표된 ‘아마기고에(아마기 고개 넘기)’다. 

1981년 기획사에서 자신의 홍보를 담당했던 직원과 결혼한 사유리는 딸을 출산하면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듯했지만, 시댁에 함께 살면서 외박도 하지 못하게 간섭하는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마음고생을 하다가 결국 8년 만에 이혼하게 된다.

이혼 3년 전에 발표한 이 곡은 그녀의 마음고생만큼이나 ‘한을 품은 여자’의 마음을 표현한 파격적인 가사를 담고 있다.

충격적인 가사 내용 덕에 이 곡은 엔카 역사상 가장 ‘강렬하고 위험한’ 곡으로 평가받는다.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차라리 죽여서라도 독점하고 싶다는, 광기에 가까운 집착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시카와 사유리 나무위키

 

아마기고에(天城越え)

 

“차마 감출 수 없는 옮은 향기가

언제부턴가 당신에게 달라붙었어요

누군가에게 빼앗길 정도라면

당신을 죽여도 괜찮을까요

 

잔 뒤 흐트러져서 숨겨진 숙소

구불구불한 산길 죠렌 폭포

날아오르곤 흔들리며 떨어지는

어깨너머로 당신 산이 불타네

 

무슨 일이 있어도 이젠 상관없어요

어질어질 타오르는 불을 빠져나와서

당신과 넘고 싶어 아마기 고개~”



하지만 이 노래가 ‘저속한 치정극’으로 흐르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이시카와 사유리의 창법 덕분이었다. 

그녀는 이 무시무시한 가사를 울부짖으며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술을 깨물며 참아내는 듯한 ‘절제의 미학’을 선보였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가수가 아니라, 한 편의 비극 영화를 연기하는 배우와 같았다. 노래 중간중간 섞여 나오는 그녀의 날카로운 호흡과 애절한 눈빛은 관객들을 숨 막히게 했다. 이 곡을 통해 엔카는 단순히 ‘슬픈 유행가’에서 ‘고도의 심리 묘사가 담긴 문학적 예술’로 격상되었다. 

 

이 곡은 일본의 유명한 작사가 ‘요시오카 오사무(작사가협회 부회장)’와 작곡가 ‘겐 테츠야(작곡가 협회장)’이 오직 사유리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겠다며 실제 아마기산(시즈오카 이즈반도에 있는 해발 1406m의 화산)에 있는 온천 료칸에서 묵으면서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986년도에 발표했지만, 과거 일본의 야구 스타인 이치로가 타석에 들어서면 나오는 곡으로 유명하기도 했고, 오늘날 일본의 젊은 세대들도 노래방에서 가장 도전하고 싶은 엔카 1위로 이 곡을 꼽는 이유는 그 압도적인 예술성 때문이다. 

 

무대 뒤 독립적인 삶 ‘신여성 엔카 가수’


이시카와 사유리의 음악이 유독 힘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녀의 주체적인 삶과도 관련이 있다. 그녀는 흔히 엔카 가수가 보여주는 ‘수동적인 여인상’에 갇히지 않았다.

1980년대 초, 인기 절정의 순간에 그녀는 매니저와의 결혼을 선택하며 화제를 모았고, 이후 이혼을 겪으면서도 결코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시카와 사유리 SNS오히려 1인 기획사를 설립해 노래방사업 등에도 손을 대면서 큰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음악적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는 ‘독립적인 여성 리더’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그녀의 강단 있는 성격은 노래에 고스란히 투영되었다. 

그녀가 노래하는 비극은 “나를 버리지 마세요.”라고 애원하는 슬픔이 아니다. “비록 비극적인 운명일지라도 내가 선택한 길이니 당당히 가겠다.”라는 존엄함이다. 이것이 바로 이시카와 사유리가 구축한 ‘신여성 엔카’의 핵심이다.

  

한국의 ‘한(恨)’ 정서와도 깊은 공명

 

이시카와 사유리의 음악 세계는 한국의 트로트 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녀의 위상은 한국의 이미자와 묘하게 겹친다.

이미자가 ‘섬마을 선생님’이나 ‘동백 아가씨’를 통해 한국 여인들의 인고 세월을 위로했다면, 이시카와 사유리는 ‘쓰가루 해협’과 ‘아마기 고개’를 통해 일본 여인들의 내면을 대변했다. 두 가수 모두 과도한 신파를 배제하고, 목소리 자체에 실린 무게감으로 대중을 압도한다.

실제로 한국의 정통 트로트 여가수들 사이에서 이시카와 사유리는 반드시 거쳐야 할 ‘교과서’와 같은 존재다. 


이시카와 사유리 SNS

슬픔을 내뱉기보다 안으로 갈무리하며, 마지막 한 소절에서 감정을 폭발시키는 그녀의 구성진 가락은 한국의 ‘한(恨)’ 정서와도 깊은 공명을 일으킨다.

대표곡 ‘쓰가루 해협 겨울 풍경’은 최근 한일가왕전에서 김다현이 불러서 화제가 되기도 했고 이 외에도 홍지윤 장태희 등 젊은 트로트 가수부터 주현미 김연자 등 원로 가수들도 불러 한국 팬들에게도 익숙한 곡으로 알려져 있다. 

 

전통은 낡은 것이 아니라 ‘깊어지는 것’

 

K-트로트가 세계화를 향해 나아가는 지금, 이시카와 사유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그녀는 50년 동안 단 한 번도 엔카라는 장르를 부끄러워하거나 유행에 맞춰 훼절하지 않았다. 대신 그 장르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술성을 뽑아냈다.

트로트가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화려한 퍼포먼스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 장르만이 줄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한 감동’이 있어야 한다. 

이시카와 사유리는 전통이 어떻게 현대와 호흡하고, 어떻게 클래식으로 남을 수 있는지를 몸소 증명해 보였다.


 이시카와 사유리 SNS

 오늘도 그녀는 정성스럽게 기모노를 입고 ‘아마기 고개’를 넘는다. 

그녀의 노래가 멈추지 않는 한, 엔카는 낡은 과거가 아닌 살아있는 현재로 남을 것이다. 

우리 트로트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명제는, 이시카와 사유리라는 거울을 통해 다시 한번 그 빛을 발한다.

 


 

➭다음 편 예고: [일본을 울린 엔카 스타 10인] 제4편 – 모리 신이치(森進一) “허스키 보이스의 원조, 남자의 고독을 정의하다.” — 여심을 울린 마성의 목소리 속에 감춰진 눈물겨운 가족사와 음악 이야기.

 

 

박강민

박강민

기자

oasis365@gmail.com

박진수

박진수 1일 전

<쓰가루 해협 겨울풍경>은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모르는 일본인은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엔카의 대표곡입니다. 엔카의 특징을 고루 갖춘 딱 한 곡만 고르라면 이 곡이 선택될 것 같을 정도로 명곡입니다.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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